2001년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 가오나시. 검은 그림자에 하얀 가면을 쓴 이 존재는 말 한마디 없이 “아… 아…”라는 소리만 내면서도 전 세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2024년 1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영화 개봉 20여 년 만에 가오나시의 정체를 직접 밝혔습니다. 그가 말한 가오나시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밝힌 가오나시의 정체
2024년 1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오랜 침묵을 깨고 가오나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가오나시는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어 하지만 자아가 없는 사람이죠. 만나는 사물과 사람에 따라 변하는 존재입니다.”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가오나시는 특정 요괴나 신화적 존재를 그린 것이 아닙니다. 뚜렷한 가치관이나 신념 없이 타인에게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 주변에 친숙하지만 실체가 없는 사람들을 형상화한 캐릭터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캐릭터 탄생 비화
흥미롭게도 가오나시는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프로듀서가 영화 러닝타임이 3시간을 넘는다고 알렸을 때, 미야자키 감독은 스토리를 함축할 수 있는 강렬한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가오나시입니다.
가오나시(カオナシ)라는 이름의 의미
가오나시는 일본어로 ‘가오(顔/かお)’는 얼굴, ‘나시(無し/なし)’는 없음을 뜻합니다. 영어 이름 ‘No-Face’도 이를 직역한 것입니다. 이름 그대로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하얀 가면만 있고, 입은 몸통에 따로 위치해 있습니다.
가오나시는 언어를 스스로 구사할 수 없어 평상시에는 “아… 아…”라는 소리만 냅니다. 언어 구사가 가능한 대상을 삼키면 그 대상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설정 자체가 ‘자기 목소리가 없는 존재’라는 상징성을 강화합니다.
노(能) 가면과의 연관성
가오나시의 디자인은 일본 전통 가면극 노(能)의 가면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노 가면은 무표정하면서도 보는 각도와 조명에 따라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오나시의 가면도 마찬가지로, 기분에 따라 미묘하게 표정이 달라 보입니다. 총괄 애니메이터 안도 마사시는 “가오나시의 가면을 노 가면처럼 완전히 무표정하게 만들고 조명으로만 표정을 전달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가오나시가 상징하는 4가지 의미
1. 정체성 상실과 자아의 부재
가오나시는 자신만의 얼굴, 목소리, 성격이 없습니다. 만나는 사람과 환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합니다. 온천장에서 욕심 많은 직원들과 어울리자 탐욕스러운 괴물이 되었고, 제니바의 소박한 시골집에서는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주변 환경과 타인에게 휘둘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2. 외로움과 연결에 대한 갈망
극 중 가오나시는 “외롭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립니다. 치히로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자 집착하게 되고, 그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황금을 내놓습니다.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했던 존재가 갑자기 연결을 경험했을 때의 혼란과 집착을 보여줍니다.
3. 물질만능주의와 탐욕
가오나시는 손에서 황금을 만들어내며 온천장 직원들의 환심을 삽니다. “갖고 싶다, 먹고 싶다”며 끝없이 음식과 물건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소비와 물질에 대한 현대인의 탐욕을 형상화합니다. 특히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이후 사회적 불안과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4. 치히로가 느끼는 두려움의 구현체
가오나시는 치히로가 겪는 버림받음, 외로움, 정체성 혼란에 대한 두려움이 형상화된 존재로도 해석됩니다. 텅 빈 형태와 우정에 대한 갈망은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진 치히로의 위기 상황을 거울처럼 비춥니다.
가오나시의 변화: 괴물에서 순수함으로
다리 위의 첫 만남
치히로가 가오나시를 처음 만난 장소는 다리 위입니다. 일본 노 연극에서 주인공이 영혼을 만나는 장소도 항상 다리입니다. 다리는 이승과 저승,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로, 가오나시의 경계적 존재감을 암시합니다.
온천장에서의 타락
치히로가 비를 피하라며 문을 열어주자 가오나시는 온천장에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치히로를 돕고 싶어하는 순수한 모습을 보였지만, 황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음식과 직원들을 닥치는 대로 삼키며 거대한 괴물로 변합니다.
정화와 회복
치히로가 건네준 강의 신 경단을 먹은 후 가오나시는 삼킨 것들을 모두 토해내고 원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이후 제니바의 시골집에 머물게 되는데, 이곳은 유바바의 온천장과 달리 물질주의와 거리가 먼 공간입니다. 가오나시가 욕심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2026년 현재, 가오나시가 더 의미 있는 이유
미야자키 감독이 2001년에 그린 가오나시의 모습은 2026년 현재 더욱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SNS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 대신 ‘페르소나’를 내세우는 현대인, 타인의 평가와 좋아요 수에 자존감이 흔들리는 사람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가오나시는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 혼란을 20년 전에 미리 그려낸 예언적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비관적인 메시지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오나시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치히로의 순수한 친절 덕분이었습니다. 황금이 아닌 진심 어린 관계, 탐욕이 아닌 나눔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가오나시는 선한 캐릭터인가요, 악한 캐릭터인가요?
가오나시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지만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합니다. 온천장의 탐욕스러운 분위기에서는 괴물이 되었고, 제니바의 평화로운 집에서는 순수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가오나시를 통해 환경이 인간의 본성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가오나시가 치히로에게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치히로가 처음으로 가오나시에게 관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비를 피하라며 문을 열어준 사소한 친절이었지만,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가오나시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연결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던 가오나시는 황금을 내놓으며 그 관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가오나시의 가면은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요?
일본 전통 가면극 노(能)의 가면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노 가면은 무표정하면서도 조명과 각도에 따라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오나시의 가면도 장면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표정으로 보이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가오나시는 일본 요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나요?
직접적인 모델은 없지만, 얼굴이 없는 일본 요괴 ‘놋페라보(Noppera-bo)’와 유사점이 있습니다. 놋페라보는 눈, 코, 입이 없는 요괴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은 텅 비어 있습니다. 다만 미야자키 감독은 특정 요괴를 참고했다고 밝힌 적은 없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가오나시는 어떻게 되었나요?
가오나시는 제니바의 시골집에 남아 그녀의 조수로 살게 됩니다. 물질주의와 거리가 먼 소박한 환경에서 뜨개질을 배우며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적절한 환경과 진심 어린 관계 속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결말입니다.
가오나시가 토해낸 경단은 무엇인가요?
치히로가 건네준 것은 강의 신에게 받은 쓴 경단입니다. 이 경단은 정화와 치유의 효과가 있어, 가오나시가 삼킨 모든 것을 토해내고 원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하쿠의 저주를 풀 때도 같은 경단이 사용되었습니다.
마무리
가오나시는 자아 없이 타인에게 의존하고, 물질로 관계를 사려 하며, 외로움에 허덕이는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캐릭터를 통해 정체성 상실, 소비주의, 진정한 연결에 대한 갈망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가오나시의 이야기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환경과 진심 어린 관계 속에서 누구나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20년이 넘은 지금도 가오나시가 전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조금씩 가오나시가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